지리산 성삼재와 차일봉의 하얀 잔설이 아직 녹지 않은 산자락에 노란색 파스텔을 칠한 듯 구례 산동면의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영원불멸의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산수유는 산에서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성삼재 너머로는 노고단과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이 우람하게 이 땅을 지키고 있으며, 구례 산동면 산수유 마을에서 바라보면 성삼재 왼쪽에는 만복대, 오른쪽에는 차일봉이 있습니다. 비록 예년보다 낮은 기온으로 산수유가 완전히 만개하지 않았지만, 성급하게 봄을 마중 나온 관광객들은 이미 마을을 북적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매화, 벚꽃과 함께 대표적인 봄꽃으로 꼽히는 산수유는 이들보다 빨리 피어 새봄의 전령 역할을 합니다. 특히 전국 산수유나무의 70%가량이 자라는 전남 구례는 국내 최대 산수유 군락지로, 꽃이 피는 3월이면 약 1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옵니다.
산수유길, 오감으로 즐기는 봄의 축제
구례 산동면에는 산수유 풍경과 이야기를 따라 걷는 총 5개 코스, 12.4km의 산수유길이 있습니다. 대표 코스인 1코스(3.6km)에서는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인 서시천과 노란 산수유꽃이 어우러진 시적인 풍경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꽃 담길'이라 불리는 1-1코스는 산수유 사랑공원, 산수유 문화관, 반곡마을을 지나며, '꽃길'이라 불리는 1-2코스 끝에는 지리산 산나물, 말린 산수유 열매 등을 판매하는 지리산나들이 장터가 있습니다. 산수유 사랑공원은 '영원불멸의 사랑'을 주제로 조성되었으며, 이곳에 서면 산수유꽃으로 수놓인 정겨운 마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골짜기 밑 소반처럼 평평한 곳에 형성된 반곡마을은 봄이면 산수유꽃으로 가득 차는 꽃 대궐이며, 탐방객들은 반곡마을과 서시천 사이에 놓인 나무 데크 길을 걸으며 추억을 쌓고 있습니다. 5코스 근처 계척마을에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심은 산수유나무인 '할머니 나무'가 있습니다. 수령이 1천 년 이상인 이 시목은 구례 산수유의 시작점으로, 옛날 중국 산동성에서 시집온 처녀가 모친의 당부로 고향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가져와 심었다고 합니다. 이 산수유 시목지는 또한 남도 이순신 길 백의종군로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제1구간은 산동 면 소재지부터 우리밀 체험관, 광의면 사무소까지 이어지는 11.7km로, 충무공의 고뇌의 길을 미래의 희망으로 승화시킨 발자취를 따라 걷는 이들이 산수유가 흐드러진 봄날에는 특히 많습니다.
천년의 역사, 산수유와 구례 사람들의 이야기
구례군은 전체 면적의 70% 이상이 임야로, 경작지가 부족한 산간 지역입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산동면 주민들은 약 천 년 전부터 생계유지 수단으로 약용 작물인 산수유를 재배해왔습니다. 집 주변, 산등성이, 개울가 등 흙이 있는 곳이라면 맨손으로 돌을 골라내고 산수유를 심었으며, 골라낸 돌로 쌓은 돌담은 토양 유실 방지, 수분 증발 억제, 바람 차단, 뿌리 지지 역할을 하면서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가 되었습니다. 구례의 산수유 군락지는 228헥타르에 이르며, 수확한 열매가 고급 한약재로 팔려나가면서 가난한 산촌 주민들의 주 수입원이 되었습니다. 제주도 감귤나무, 고흥 유자나무처럼 산수유도 몇 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까지 공부시킬 수 있다는 말이 돌면서 '대학 나무'로 불렸습니다. 옛날 구례에는 산수유의 독성이 있는 씨를 제거하기 위해 이로 씨를 깨물어야 했기 때문에 이가 부러지고 입술이 부르튼 여성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꽃과 계절의 정취 이면에는 앞서간 사람들의 고단했던 삶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지와 계곡에서 지속적으로 유지, 관리돼 온 구례의 산수유 농업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국가중요농업유산 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건강의 보고, 구례 산수유의 약용 가치
산수유 열매는 예로부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건강에 매우 좋은 과실로 여겨져 왔으며, '무병장수를 책임지는', '건강 지킴이'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어린아이 야뇨증, 노인의 빈뇨 개선에 쓰일 정도로 신장 기능을 강화하고, 정력 증강, 노화 방지, 항염·항균, 혈당 강하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피로와 무기력증 해소에 좋고 뼈와 눈을 튼튼히 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층층나뭇과에 속하는 산수유의 열매는 8~10월에 붉게 익으며, 10월 중순 이후에 수확해 육질과 씨를 분리하는데, 육질은 술, 차, 한약 재료로 사용됩니다. 특히 구례 산동 산수유의 품질은 세계 제일로 꼽히는데, 이는 구례의 자연환경, 토질, 기후가 산수유 생육에 적합해 이곳에서 자란 산수유 열매는 육질이 두텁고, 시고 떫은 맛이 두드러지며, 색이 곱고 효능이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남도의 봄, 꽃으로 물든 삼색 마을
구례에서는 3, 4월 꽃 잔치가 이어집니다. 산수유 축제가 끝날 때쯤인 3월 말부터 벚꽃이 피기 시작해 4월 중순까지 섬진강, 서시천 일대를 중심으로 벚꽃 길이 300리 이어집니다. 특히 섬진강과 서시천 옆 자전거 길 약 50km는 동호인 사이에 '벚꽃 라이딩' 명소로 손꼽힙니다. 또한 매서운 추위를 이기고 피어나 불교적 깨달음을 상징하는 화엄사 홍매화도 구례의 봄을 알리는 전령사로, 3월이면 '화엄 매' 사진 콘테스트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작가들이 모여듭니다. 구례 문화관광해설사 임세웅 씨는 "곳곳에 이름난 벚꽃 관광지가 많지만, 벚꽃 길이 가장 긴 곳은 단연코 구례"라며 "조만간 구례는 산수유뿐 아니라 벚꽃 명소로도 전국 최대의 관광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꽃 동네는 구례를 지나 전남 광양, 경남 하동까지 이어집니다. 매화 마을로 유명한 광양, 벚꽃 십 리 길이 상춘객을 매혹하는 하동은 구례 산수유 마을과 함께 남녘의 3대 꽃 마을로 통합니다. 세 지역은 서로 가까워 광양 매화마을을 찾았던 관광객이 구례 산수유 마을을 방문하기도 하고, 그 반대 경우도 흔합니다. 하동 벚꽃 십 리 길로 향하던 나그네가 발 디딜 틈을 못 찾고 구례로 행선지를 바꾸기도 합니다. 지금 한반도 남쪽은 꽃과 사람이 한데 어우러진 황홀한 꽃 세상입니다.